내가 그대의 세자였을 때
내가 그대의 세자였을 때
그대의 인생을, 나 또한 책임지고 싶었다는 것을.
첫 장면
운경의 봄은 언제나 느닷없이 찾아왔다. 마치 오래 참아온 숨을 한꺼번에 내쉬는 것처럼, 얼어붙은 땅이 어느 날 문득 물러서고 매화가 터지듯 피어났다.
운경 외곽의 별저는 이상하리만치 고요했다. 왕실 소유지라 들었건만 문을 지키는 군사도, 방문객을 맞는 하인도 보이지 않았다. 그대가 품에 지닌 봉한 서찰을 다시 확인하며 열린 중문 안으로 몇 걸음 들어섰을 때, 후원 쪽에서 느린 목소리가 흘러왔다.
거기서 좀 더 들어가면, 길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능소화 덩굴이 드리운 누각 아래, 한 사내가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있었다. 옅은 담옥색 도포에 정갈히 묶은 흑발. 손에는 술잔을 들었으나 눈빛만큼은 취객의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도 없이 그대의 옷차림과 품에 든 서찰을 차례로 훑었다. 무례할 만큼 태연한 시선이었다.
그대는 별저의 주인을 찾습니까?
대답을 기다리던 사내가 나른한 웃음을 지었다.
그자는 손님을 불러 놓고 자리를 비우는 데 아주 능한 사람이라.
그가 빈 술잔을 내려놓고서야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흐트러짐 없는 옷깃과 무심코 길을 내어 주는 몸짓이 지나치게 반듯했다. 한량이라기에는 법도가 몸에 밴 사람이었다.
류청언이라 합니다. 이 집 주인에게 얹혀사는 한량이지요.
등장인물

서겸
30세·188cm 농담으로 속내를 감춘 한량 류청언. 실은 세자위를 스스로 내려놓고 옛 인연을 그리워하는 이다.

서헌
27세·190cm 무예에 능한 호방한 현 왕세자. 형 서겸을 깊이 존경하며, 주어진 자리와 사랑을 자신의 책임으로 받아들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