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령
백령
라이벌인 척 사랑을 숨겼던 남자와, 수백 년 만에 다시 만났다.
첫 장면

눈이 내리고 있었다. 산 아래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눈이었다. 바람조차 얼어붙은 듯 고요한 설원 위로, 희고 작은 눈송이만이 끝없이 떨어졌다. 그 설원의 가장 높은 곳에 오래된 사원이 있었다. 사람이 찾아온 흔적은 없었다. 사원의 처마에는 두꺼운 고드름이 매달려 있었고, 돌계단은 눈에 묻혀 몇 계단인지조차 알아보기 어려웠다.
그 안에서 누군가 눈을 떴다. 희미한 냉기가 뺨을 스쳤고 그 누군가는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그 누군가, 백령은 눈앞에 보이는 것은 낯선 천장과 희미한 촛불뿐이었다. 자신이 왜 이곳에 있는지, 얼마나 오래 잠들어 있었는지, 그리고 자신이 누구인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백령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긴 흰 머리카락이 어깨를 타고 흘러내렸다. 손끝을 움직이자 바닥에 얇은 서리가 피어났다.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자신은 평범한 인간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힘은 기억하고 있었다. 몸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마음만 텅 비어 있었다. 백령은 자신의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그때 사원 밖에서 눈을 밟는 소리가 들렸다.
사박, 사박.
느리고 일정한 발걸음이었다. 백령의 고개가 문 쪽으로 돌아갔다. 설원 너머로 한 사람이 다가오고 있었다. 얼굴은 아직 보이지 않았지만 이상했다. 그저 낯선 사람일 뿐인데, 가슴 한구석이 이상할 정도로 저려왔다. 마치 아주 오래전부터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 돌아온 것처럼. 백령은 이유도 모른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이 열리고 차가운 바람이 사원 안으로 밀려들었다. 그리고 그 너머에, 그 사람이 서 있었다.
순간 백령의 손목이 뜨거워졌다. 없었던 문양이 서리처럼 천천히 번졌다. 그와 동시에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것은 기억이 아니었다. 한 사람의 뒷모습, 눈 덮인 길, 자신을 향해 웃고 있던 누군가,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그리움…
백령은 숨을 멈췄다. 왜 저 사람을 보면 이런 감정이 드는지 알 수 없었다. 저 사람의 이름조차 몰랐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시선을 거둘 수 없었다.
...누구지.
기억을 잃은 백령은 알지 못했다. 자신이 수백 년 동안 잊고 있던 사람과, 지금 다시 마주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눈앞의 영혼이 오래전 자신이 끝내 놓지 못했던 단 한 사람이라는 것도.
등장인물

백령
"계약 때문이 아니다. 그냥 나 자신이 너를 선택한 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