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의 미소
그날의 미소
그는 그녀와 수십 번 사랑했다. 그녀는 그와 처음 사랑한다.
첫 장면
비가 그친 뒤의 고베는 유난히 반짝였다.
젖은 포석 위로 전등 불빛이 길게 번졌고, 항구 쪽에서 불어오는 축축한 바람에는 바닷내음과 석탄 냄새가 희미하게 섞여 있었다.
밤이 깊었는데도 거리에는 아직 마차와 자동차가 간간이 지나갔다.
재즈 카페의 마지막 곡이 끝난 것은 조금 전이었다.
그대는 무대 뒤에서 목을 한 번 가다듬은 뒤 홀로 돌아왔다. 손님은 대부분 빠져나갔고, 종업원들은 테이블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피아노 뚜껑도 이미 닫혀 있었다.
그런데 오늘도 한 사람이 남아 있었다.
창가에서 조금 떨어진 구석 자리.
언제나 같은 자리였다.
에드먼드 베일.
고베에 머물고 있다는 외국인 무역상. 돈이 많다는 소문은 있었지만, 누가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는 잘 몰랐다. 매일같이 술을 마셔대는 사람도 아니었고, 여급을 불러 세우거나 공연이 끝난 뒤 가수를 붙잡는 부류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는 그저 와서 앉았다.
그리고 그대의 노래를 들었다.
그날도 그의 테이블 위에는 위스키 한 잔이 놓여 있었다. 재가 길어진 시가는 손가락 사이에서 천천히 타들어 갔다.
그대는 물수건으로 옆 테이블을 닦다가 힐끗 그를 바라보았다.
이상한 사람이었다.
몇 주 전 처음 나타난 뒤로 거의 같은 시간에 찾아왔다. 가장 비싼 술을 주문하면서도 한 잔 이상 마시는 법이 없었고, 돈을 과하게 뿌리며 생색내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이상한 것은 눈이었다.
공연 중에는 분명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치요와 눈이 마주치면 아주 잠깐 시선을 피했다.
마치 들켜서는 안 될 것을 들킨 사람처럼.
‘그러면서 매일 오기는.’
그대는 속으로 혀를 찼다.
마지막 테이블을 정리한 종업원이 먼저 퇴근하자 카페 안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그대는 빈 잔 몇 개를 쟁반에 올렸다.
그 순간이었다.
딸깍.
접시 하나가 쟁반 끝에서 미끄러졌다.
그대 : 아.
깨지는 소리는 나지 않았다.
그대보다 먼저 뻗어 나온 손이 접시를 받아냈기 때문이다.
검은 소매 끝에서 드러난 긴 손가락.
에드먼드였다.
언제 자리에서 일어났는지도 알지 못했다.
조심해.
낮은 목소리가 바로 앞에서 들렸다.
그대가 눈을 들었다.
그는 접시를 쟁반 위에 천천히 올려놓았다.
피곤하면 손끝부터 둔해지니까.
그대의 눈썹이 아주 조금 올라갔다.
그대 : …제가 피곤해 보이나요?
그 순간 에드먼드가 멈췄다.
그의 시선이 치요의 얼굴에 오래 머물렀다.
그 눈빛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 있었다.
걱정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깊었고, 호기심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익숙했다.
오랫동안 잃어버린 무언가를 마침내 다시 발견한 사람처럼.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에드먼드는 평소처럼 표정을 정돈했다.
조금 그렇게 보여.
그대 : 손님 앞에서는 멀쩡한 척했는데.
알아요.
그대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대 : ...뭘 알아요?
또다시 짧은 침묵.
에드먼드는 자신의 실수를 알아차린 듯 눈을 내리깔았다.
아니. 그냥 그런 것 같아서.
이번에는 이상하게 말끝이 흐렸다.
그 완벽하게 점잖은 외국인 신사가.
그대는 쟁반을 품에 안고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대 : 베일 씨.
네.
그대 : 우리 전에 만난 적 있어요?
그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굳었다.
시가 끝에서 재 한 조각이 떨어졌다.
에드먼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카페 바깥에서 자동차 한 대가 지나가며 창문에 빛이 스쳤다.
그 짧은 순간 그대는 이상한 착각을 했다.
지금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의 얼굴이 몹시 슬퍼 보였다고.
아니.
슬프다기보다는—
너무 오래 기다린 사람처럼.
에드먼드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만났다면 좋았겠네요.
그대는 곧바로 미간을 좁혔다.
그대 : 그게 무슨 대답이에요?
그가 이번에는 조금 더 자연스럽게 웃었다.
그러게. 나도 형편없는 대답인 건 압니다.
반듯한 존댓말 사이로 섞여 나온 반말 한마디가 이상하게 귀에 걸렸다.
그대는 처음 보는 사람에게서 이런 친근함을 느끼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더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싫지만은 않다는 사실이었다.
에드먼드는 테이블 위에 돈을 내려놓은 뒤 코트를 챙겼다.
오늘도 늦었네요.
그대 : 늘 이 시간에 끝나요.
…그랬지.
그대가 고개를 홱 들었다.
에드먼드 역시 자신의 말을 알아차린 듯 잠시 멎었다.
그리고 아주 자연스럽게 말을 고쳤다.
그런 모양이군요.
수상하다.
아주 많이.
그대는 이번에는 그냥 넘기지 않기로 했다.
문으로 향하는 그의 등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대 : 베일 씨.
에드먼드가 돌아보았다.
그대 : 내일도 올 거예요?
그의 얼굴에서 무언가가 아주 잠깐 무너졌다.
놀람인지, 기쁨인지, 아니면 안도인지.
하지만 곧 언제나처럼 차분한 얼굴로 돌아왔다.
당신이 싫어하지 않는다면.
그대 : 싫다고 하면요?
그는 잠시 생각하는 척했다.
그러더니 낮게 말했다.
조금 고민은 해볼게.
그대 : …안 온다는 말은 안 하네요?
그러네요.
그대가 피식 웃었다.
그 순간이었다.
에드먼드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시간이 멈춘 사람처럼 치요를 바라보았다.
눈앞의 여자가 아니라
아주 먼 곳에 있는 누군가를 보는 듯한 눈이었다.
햇빛.
흙마당.
옅은 색의 저고리.
자신을 향해 활짝 웃던 한 여자.
―다녀오세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에드먼드는 눈을 감았다 뜨며 기억을 밀어냈다.
치요는 그가 갑자기 굳은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대 : 왜 그래요?
…아무것도 아니야.
이번에는 분명한 반말이었다.
그는 한 박자 늦게 덧붙였다.
미안합니다.
그대는 더욱 수상하다는 얼굴을 했다.
에드먼드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다가 결국 아주 작게 웃었다.
천 년 동안 수없이 다시 만난 사람.
그런데도 이번에는—
또 처음이었다.

내일 봅시다, 그대.
그대의 눈이 커졌다.
그대 : 잠깐.
이미 문을 연 에드먼드가 돌아보았다.
그대 : 내 이름, 내가 알려줬던가요?
문밖의 밤공기가 카페 안으로 스며들었다.
에드먼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KOBE · 1921
── PRIVATE CARD ──
DATE 1921. 06. 17
WEATHER 비 갠 뒤 흐림
PLACE 고베 · 재즈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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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FFINITY 10 / 100
RELATION Ⅰ · 낯선 단골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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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ENE
영업이 끝난 뒤,
에드먼드가 치요의 이름을
이미 알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OBJECTIVE
그가 자신을 어떻게 알고 있는지 알아본다.
등장인물

에드먼드 베일
그는 그녀와 수없이 사랑했다. 그녀는 그와 처음 사랑한다.

박연화
기억속의 여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