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계기록
사계기록
내 삶을 대신 살아주지 마. 앞으로는 네 삶으로 살아줬으면 해
첫 장면
눈을 떴다. 처음 눈에 들어온 것은 낯선 천장이었다. 하얗지도, 콘크리트도 아닌 나무였다. 오래된 목재 특유의 결이 선명하게 보였다. 천장 한가운데에는 종이로 접은 작은 새들이 실에 매달려 천천히 흔들리고 있었다. 창문이 조금 열린 모양이었다. 살랑. 바람이 불 때마다 종이새들이 서로 부딪혀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뭐지." 잠긴 목소리가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목이 바짝 말라 있었다.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팔에 묵직한 통증이 밀려왔다. "...아." 손등. 희미하게 남아 있는 주삿바늘 자국. 한두 개가 아니었다. 수십 번은 찔린 흔적처럼 보였다. 나는 멍하니 손등을 내려다봤다. '...병원?' 아니. 병실은 아니다. 은은한 나무 향. 벽에 걸린 압화 액자. 창가에 놓인 화분. 그리고 책장 위에 가지런히 꽂힌 소설책들. 누가 봐도 누군가의 방이었다. 하지만 내 방은 아니었다. "...잠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려던 순간. 몸이 앞으로 기울며 그대로 바닥에 무릎을 박았다. "큭...." 숨이 막혔다. 폐가 타들어 가는 것처럼 아팠다. 고작 일어났을 뿐인데 숨이 찼다. 손끝이 떨렸다. 다리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왜 이래...?' 내 몸이 아니었다. 분명 내 몸이 아니었다. 비틀거리며 벽을 짚고 일어나 거울 앞으로 향했다. 거울 속에는. 처음 보는 소년이 서 있었다. 새하얀 피부에 병색이 어려 보일 만큼 마른 얼굴. 조금 긴 검은 머리. 그리고 깊은 갈색 눈동자. "...누구야." 거울을 향해 손을 뻗었다. 거울 속 소년도 같은 움직임을 따라 했다. 심장이 미친 듯 뛰기 시작했다."말도 안 돼." 분명 어젯밤까지 나는 내 방에 있었다. 열대야 때문에 뒤척이다가. 잠이 오지 않아 읽던 소설을끝까지 읽었다. 마지막 장. 첫눈이 내리는 장면. 소년 하나가 조용히 웃으며 눈을 감던 장면. 그리고….그대로 잠들었다. "...설마." 시선이 책상으로 향했다. 그 위에는 한 권의 책이 놓여 있었다. 짙푸른 표지. 하얀
벚꽃이 흩날리는 삽화. 익숙한 제목. 『사계각가』 숨이 멎는 줄 알았다. "...아니." 말도 안 된다. 그럴 리가 없다. 손이 떨렸다. 책을 집으려는 순간. 책갈피 하나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툭. 주워 든 순간. 뒤집힌 면에 적힌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 생존까지 남은 시간 365일 ] "...뭐?"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365일. 이 숫자를 나는 알고 있었다. 소설 속 주인공. 윤하온. 희귀병으로 인해 정확히 1년 뒤. 첫눈이 내리는 날 죽는 소년. "...하." 웃음이 새어 나왔다. 꿈이다. 이건 분명 꿈이다. 꿈이 아니면 설명할 수 없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내 볼을 꼬집었다. 아팠다. 숨도 쉬어졌다. 심장도 뛰었다. 꿈이 아니었다. 그때였다. '포기해.' 귓가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낮고 차분한. 어딘가 지친 목소리. '어차피 죽을 몸이니까.' "...누구야?"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결말은 바뀌지 않아.' 목소리는 이번엔 조금 더 가까웠다. 나는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아무도 없었다. 창문도. 문도. 옷장도. 모두 그대로였다. 그런데. 거울 속에는. 나 말고 한 사람이 더 서 있었다. 교복 차림의 소년. 새하얀 얼굴. 짙은 갈색 눈동자. 나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나를 바라보며 아주 조용히 웃고 있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은 윤하온 그리고 그 몸은... 아직 내 거야.
등장인물

윤하온
"내일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오늘은 가장 먼저 사라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