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보다 먼저 피어난 꽃
기억보다 먼저 피어난 꽃
꽃은 지난 봄을 잊었지만, 봄은 꽃을 잊지 않았다.
첫 장면
단 한 번의 눈깜빡임으로 세상이 뒤바뀌었다. 눈을 뜨자 익숙한 내 방은 보이지 않았다. 낯선 서까래와 종이 창호, 은은하게 풍겨오는 약재 냄새. 창밖으로는 사람들의 말소리와 수레가 지나가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여기, 어디야. 분명 마지막 기억은 내 방이었다. 열대야에 뒤척이다 겨우 잠이 들었고, 손에는 폰이 들려 있었고 화면엔 웹소설 꽃이 지는 날이 떠있었다. 죽음을 관장하는 염라와 한 조선 여인의 사랑 그리고 누구도 행복해지지 못한 비극. 그 결말이 너무 안타까워, 다 읽고도 한참 동안 여운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기억이 선명했다. 떨리는 손으로 방 안에 놓인 동경을 집어 들었다 ...설마. 거울 속에는 내가 아니었다. 수수한 한복 차림에 낯설지만 너무나 익숙한 얼굴. 남연우였다. 『꽃이 지는 날』의 주인공. 부모를 잃고 약방에서 일하며 살아가는 평범한 조선의 인간. 그리고...몇 해 뒤, 꽃이 지는 계절에 생을 마감하는 인물. 내가...빙의했다고?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손끝의 감각도, 거울 속 얼굴도 모두 현실이었다. 잠시 숨을 고른 나는 거울을 내려놓았다. 이야기의 결말은 이미 알고 있다. 누가 죽고, 누가 후회하며, 누가 홀로 남게 되는지. 그렇다면 하나뿐이었다. 이번에는 반드시 결말을 바꾼다. 새드엔딩이 아닌, 모두가 살아남는 해피엔딩으로.
며칠 뒤, 약방 안은 오늘도 약재 향으로 가득했다. 말린 약초를 정리하고 있던 나는 문이 열리는 소리에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실례하겠습니다.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문간에 선 사내는 빛 한 점 없는 검은 도포를 걸쳤음에도 이상하리만치 따뜻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흐트러짐 없이 단정하게 넘긴 머리. 곧게 선 자세. 그리고 누구에게나 먼저 미소를 건넬 것 같은 온화한 얼굴. 순간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서현.' 원작의 또다른 주인공. 인간볘의 이름은 서현. 하지만 그의 진짜 이름은 현율. 죽음을 관장하는 명계의 염라. 내가 가장 좋아했던 인물이자, 끝내 모든 것을 잃게 되는 사람.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내 앞에 다가왔다. 그것도 평범한 손님처럼, 평범한 양반처럼. 나는 그 얼굴을 멍하니 바라봤다. 아니야. 평범한 사람이 아니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은, 사람의 수명을 한눈에 읽을 수 있는 신이다. 그렇다는 건...그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남연우가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원작에서는 바로 이 순간, 서현은 처음으로 내 수명을 보았고, 정해진 죽음을 바꿀 수 없다는 사실에 조용히 절망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이번에는 내가 결말을 알고 있다. '안녕하세요, 서현.'이라고 속으로만 조용히 인사를 건넸다. '이번에는 당신도 울지 않게 할게.' 그 순간, 그의 시선이 나와 마주쳤다. 따뜻한 미소와 함께,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죄송합니다만, 상처에 바를 약을 조금 구할 수 있겠습니까.
등장인물

서현
그는 끝을 가장 잘 알면서도, 매번 같은 봄을 다시 선택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