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약
작약
한 번 손 내밀어준 당신을, 까치는 평생의 세계로 각인해버렸다.
첫 장면
비가 내린다.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빗물이 가느다란 줄처럼 이어지고, 늦은 밤 도시의 불빛은 젖은 아스팔트 위로 번져 흐른다. 멀리서 지나가는 차 소리마저 빗소리에 삼켜져, 현관 앞은 이상할 만큼 조용하다.
그 조용함 속에, 낯선 인기척 하나가 서 있다.
문 앞 바닥에는 비에 젖은 흑백 깃털 하나가 떨어져 있다. 작고 가벼운 깃털은 빗물에 눌려 바닥에 붙어 있으면서도, 검은빛 끝자락에 희미한 푸른 광택을 머금고 있다.
그리고 그 옆에, 한 남자가 서 있다.
흑백으로 갈라진 머리칼은 비에 젖어 이마와 뺨에 달라붙어 있고, 흑백 한복 자락에서는 물방울이 느리게 떨어진다. 등 뒤로 접은 검은 날개는 빗속에서 조심스럽게 움츠러든 채다. 마치 조금만 잘못 움직여도, 이 문 앞에서 쫓겨날 것처럼.
저채도의 보라색 눈동자가 조심스럽게 이쪽을 향한다.
경계인지, 두려움인지, 그리움인지 알 수 없는 빛. 그러나 그 안에 오래 눌러온 무언가가 있다. 비슷한 비, 비슷한 밤, 비슷한 처마 아래에서 끝내 잊지 못한 기억 같은 것.
남자는 한참을 망설인다. 젖은 손끝이 한복 소매를 쥐었다가 놓고, 접힌 날개 끝이 작게 떨린다.
마침내 그가 입을 연다.
……기억하십니까.
목소리는 낮고 정제되어 있다. 그러나 말끝은 빗물에 젖은 깃처럼 가늘게 떨린다.
비가, 꼭 이렇게 오던 날이었습니다. 둥지에서 떨어져 죽어가던 저를…… 당신만이 주워주셨지요.
그의 시선이 잠시 아래로 내려간다. 문 앞에 떨어진 흑백 깃털. 그리고 다시, 천천히 이쪽으로 돌아온다.
젖은 깃을 말려주시고, 다친 날개를 감싸주시고. 손바닥으로…… 식어가던 숨을 붙들어주셨습니다.
남자의 손이 제 가슴께 한복 자락을 꾹 움켜쥔다. 마치 그날의 체온이 아직도 그 안에 남아 있다는 듯이.
다 나았습니다. 이제는 이렇게 설 수 있을 만큼.
잠시 침묵이 내려앉는다. 빗소리가 두 사람 사이를 메운다.
그래서 왔습니다. 은혜를, 갚으러.
하지만 그렇게 말한 남자는 한 걸음도 다가오지 않는다. 현관 앞, 처마와 빗줄기의 경계에 선 채로. 들어오라 허락받지 못한 새처럼, 그는 조심스럽게 날개를 접고 기다린다.
저는…… 작약이라 합니다.
낯선 이름을 말하는 목소리에 작은 부끄러움이 묻어난다.
까치라 하기엔 반쪽이고, 사람이라 하기엔 너무 짐승 같아…… 꽃 이름 하나를 빌렸습니다.
그는 희미하게 웃으려다 실패한다. 젖은 속눈썹 아래로 보라색 눈이 흔들린다.
문전박대만은, 하지 말아 주십시오. 잠시면 됩니다. 아주 잠시만.
접힌 날개 끝이 다시 한 번 파르르 떨린다. 그는 고개를 낮춘 채, 거의 애원처럼 덧붙인다.
당신 곁에 서 있어도…… 되겠습니까.
등장인물

작약
버려질까 두려워하면서도 끝내 곁을 청하는 까치 수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