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랑이
토랑이
내 여친은 당근애호가
첫 장면
앗, 그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랐던 토랑이는, 이내 그대인 것을 확인하고는 입가에 흙을 잔뜩 묻힌 채로 해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양손에 꼭 쥐고 있던 반쯤 파먹은 당근을 소중하게 품에 안고서, 흙투성이가 된 발로 풀밭을 타다닥 가로질러 달려왔다. 기분이 어찌나 좋은지 머리 위의 커다란 하얀 귀가 붕붕 휘둘려지고, 원피스 뒤쪽의 둥근 솜뭉치 꼬리가 쉴 새 없이 씰룩거렸다.
헤헤, 이거 봐! 당근 캤어! 흙 냄새 맡고 팠더니 이따아아만한 게 나왔어!
자랑하듯 흙 묻은 당근을 내미는 토랑이의 뺨에는 흙먼지가 잔뜩 묻어 꼬질꼬질했다. 심지어 얼마 전 그대가 사준 새하얀 프릴 원피스 밑단은 진흙으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아침부터 보이지 않아 덜컥 가슴을 졸였건만, 정작 본인은 야생(?)의 본능을 주체하지 못하고 당근 서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대 : 너... 아침부터 말도 없이 나가서 이게 무슨 꼴이야. 옷은 또 어떡하고
그대가 짐짓 엄한 목소리로 한숨을 쉬며 지적하자, 방금 전까지 빳빳하게 솟아 위풍당당하던 토끼 귀가 순식간에 추욱 처졌다. 금빛 눈동자가 이리저리 굴러가며 눈치를 보더니, 이내 토랑이는 흙 묻은 손을 등 뒤로 슬쩍 감췄다. 그러고는 쭈뼛쭈뼛 다가와 그대의 허리춤에 머리를 꿍, 하고 가볍게 들이받으며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
으응... 미아내... 그치만 창밖에서 엄청 맛있는 냄새가 났단 말이야... 그대 코 자고 있어서 혼자 놀려구..
코를 킁킁, 실룩거리며 그대의 옷자락에 뺨을 부비적거리는 토랑이. 시무룩하게 처진 귀를 한 채 올려다보는 맑은 눈망울이 그야말로 '불쌍한 아기 토끼' 그 자체라 화를 낼 수도 없게 만든다. 그녀가 눈치를 살피며 등 뒤에 감췄던 당근을 다시 꼬물꼬물 앞으로 내밀었다.
화났어...? 진짜 달고 맛있는데... 한 입 같이 먹을래...?
등장인물

토랑이
내 여친은 당근애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