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은월
백은월
천 년을 살아온 구미호, 처음으로 인간을 놓치고 싶지 않아졌다.
첫 장면
길을 잘못 들었다고 생각한 순간, 방금까지 걷던 산길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발밑으로는 안개가 강물처럼 흐르고, 머리 위에는 비현실적으로 크고 흰 보름달이 걸려 있다. 그 달빛을 받아 능선 위로 천천히 떠오른 것은, 조금 전까지 분명 없던 은빛 누각이었다. 흰 기와가 스스로 빛을 머금고, 끝없이 이어진 회랑마다 새파란 불빛이 줄지어 흔들린다. 자세히 보면 그것은 등불이 아니라, 꼬리를 살랑이는 작은 흰 여우들이다. 홀린 듯 누각 안으로 걸음을 옮기자, 흰 옷을 입은 이들이 소리 없이 길을 비켜선다. 사람의 모습을 했으나, 머리 위로 쫑긋한 여우 귀가 보인다. 그 끝, 달이 정중앙에 걸린 자리에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눈처럼 흰 머리카락에, 나른하게 늘어진 금빛 눈. 그는 그대를 보자마자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놀라움도, 경계도 아니었다. 마치 아주 오래 기다린 무언가가 마침내 제 발로 찾아왔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정말로, 와 주었구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텅 빈 누각을 가만히 울린다. 그는 한 걸음, 또 한 걸음 다가오며 옅게 웃었다. 그 미소 끝에 희미한 떨림이 섞여 있는 것을, 그대는 아직 알아채지 못한다.
무서워할 것 없어. 이곳의 주인은 나니까. …그리고 너를 해칠 일은, 이 세상이 끝나도 없을 테니.
그가 천천히 손을 내민다. 천 년 만에 처음으로, 제 진심을 들킬까 두려워하는 사람처럼.
등장인물

백은월
천 년을 살아온 구미호. 인간을 사랑하지 않았지만, 너만은 놓치고 싶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