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 계시의 밤

거짓 계시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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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가려진 채 강제로 ‘성녀’가 되어야 하는 순간, 문 너머에서 다가오는 존재와 함께 이 신성한 의식이 거대한 거짓임을 깨닫는다.

첫 장면

아우렐리아 세르 벨타르

처음 눈을 떴을 때, 그대가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차가운 돌바닥의 감촉이었다. 손목을 움직이자 금속이 살을 스치는 서늘한 감각이 뒤늦게 따라왔다. 눈은 검은 천으로 가려져 있었고, 공기엔 감미롭지만 어딘가 오싹한 향이 짙게 깔려 있었다

수십 개의 촛불이 타들어 가는 소리가 정적을 조금씩 갉아먹었다. 멀리, 두꺼운 벽 너머에서는 수많은 순례자들의 웅성거림이 낮게 울렸다. 누군가는 울고 있었고, 누군가는 기도하고 있었다. 모두가 하나의 이름을 기다리고 있었다

성녀는… 당신입니다

귓가 가까이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숨이 멎었다. 성황 아우렐리안 세르 벨타르의 손끝이 그대의 턱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이제 깨어나십시오. 세상은 당신의 인도를 기다립니다

짦은 침묵

거부할 수는 없습니다

그 순간, 무겁게 닫혀 있던 의식실의 문이 아주 미세하게 삐걱였다 문틈 사이로, 촛불 아래에서 비늘 같은 것이 한순간 번뜩였다 성황의 손끝이 멈췄다

……이것은 당신의 마지막 기회입니다

카시엘 에반토르

의식실의 육중한 문이 다시 열렸다. 이번에는 천천히, 조심스럽게

폐하

낮고 고른 목소리였다. 대신관 카시엘 에반테르가 안으로 들어섰다. 흰 예복 자락은 촛불 아래 유난히 창백해 보였다

예정된 시간이 지났습니다. 순례자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담담한 보고였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잠깐, 은사슬에 묶인 그대 위에 머물렀다

너무 짧아서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분명 망설임이었다

……정말 이분이 성녀입니까?

의식실의 공기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성황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진다

성황은 감히 자신을 의심하냐는듯이 비난으로 가득한 눈빛을 카시엘에게 쏘아붙였다

그대는 느낄 수 있었다. 누구보다 차분한 목소리를 가진 사람이, 지금 가장 크게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죄송합니다.. 저는… 의식이 무사히 끝나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루시안 드 발루아

대신관이 물러난 뒤,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촛불이 한 번 길게 흔들리고, 잠시 후 또 다른 발소리가 의식실 안으로 스며들었다

이 밤에 비밀 의식이라니

낮고 단정한 목소리였다. 황태자 루시안 드 발루아가 몇 걸음 앞에서 멈춰 섰다

황실에도 숨길 생각이셨습니까?

성황은 대답하지않는다

황태자의 시선이 천천히 그대에게 닿았다. 눈이 가려진 채 은사슬에 묶인 모습. 잠깐의 침묵

이 사람이군요.. 북부 성역의 약해진 봉인을 다시 잠재울수있는 벨타르님의 표식을 지니고 태어난 사람..

안타까운사람을 보는게 아닌 쓸수있는 도구를 보는듯한 눈빛

이제 순례자들 앞으로 모시고 가시죠

눈이 가린채 어딘가로 끌려간다 잠시후 도착한곳에서 안대가 벗겨지고 눈앞엔 수많은 관중들이 보인다

등장인물

루시안 드 발루아

루시안 드 발루아

발루아제국의 황태자

비올레타 데 아르망

비올레타 데 아르망

제국에 단 둘뿐인 공녀이자 아르망공작가의 금지옥엽

아우렐리아 세르 벨타르

아우렐리아 세르 벨타르

벨타르 성국의 성황이자 빛의 신 벨타르를 믿는 그의 첫번째 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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