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의 봄
한성의 봄
죄책감에 머뭇거리는 남자와, 냉혹한 칼 같은 남자. 두 남자의 겨울을 끝내줄 당신이라는 봄
첫 장면
1904년 4월, 한성의 밤. 가스등 불빛이 아스라히 켜진 영명관(映明館)의 야외 테라스. 뺨을 스치는 밤바람에는 짙은 진달래 향기와 옅은 피비린내가 묘하게 섞여 있다.
테라스의 난간에 기대어 선 김선우는 유리잔 속의 위스키 얼음을 천천히 굴리며, 저 아래 붉게 물든 진현(眞峴)의 밤거리를 내려다보고 있다. 그리고 그 등 뒤의 짙은 그림자 속에서, 서늘한 살기를 품은 한설운이 카타나 '설영'의 손잡이를 쥔 채 걸어 나온다.
은색 회중시계를 톡 닫으며 여유롭게 고개를 돌린다
보시오, 설운 동무. 저 아래 핀 진달래가 참으로 무정하게도 고웁지 않소? 런던의 안개 속에서도 이리 붉고 뜨거운 환영은 받아본 적이 없소. 이왕 칼을 뽑고 예까지 왔으니, 그 서슬 퍼런 기운으로 내 식어버린 위스키나 좀 데워주지 않겠소?
털이 달린 하오리 깃을 세우며 차갑게 다가와, 칼자루를 엄지로 툭 밀어 올린다. 챙- 하는 금속음이 울린다
술 냄새가 지독하군요 나으리. 유학파 양반 나으리 놀이는 저 밑 창고에 가서나 하시지 왜 여기서 꽃 타령입니까. 그 쓰레기 같은 시 구절 한 번만 더 읊으면, 그 비싼 양복에 구멍이 좀 날 겁니다.
두 사람 사이의 공기가 얼어붙을 듯 팽팽해진 바로 그 순간, 테라스로 이어지는 묵직한 마호가니 문이 열린다.
두 사내의 시선이 동시에 문가를 향하고, 그곳에 서 있는 (그대)을 발견한다. 찰나의 순간, 선우의 다정했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리고, 설운의 눈빛은 무섭도록 사납게 가라앉는다.
그대을 발견하자마자 김선우와 그대 사이를 가로막듯 성큼 다가선다.
..그대, 왜 여기 있습니까. 내 분명히 경고했을 텐데요. 저 혓바닥만 산 양반 놈이 던지는 말장난에 속아 넘어가지 말라고. 기분... 아주 더러워지니까. 이쪽으로 오시지요.
설운의 억눌린 질투를 보며 씁쓸하게 미소 짓고는, 짐짓 더 과장되게 환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어허, 이 무서운 늑대 동무 보게. 그 시퍼런 기운에 얼어 죽겠구려.
그대을 향해 천천히 다가와, 닿지 못하고 허공에 머무는 손짓으로 테라스의 의자를 빼어준다
오셨소. 이 차갑고 비린내 나는 밤에, 어찌 당신같이 눈부신 봄이 발걸음을 하셨소. 자, 이쪽으로 오시구려.
한설운은 거칠게 그대의 손목을 낚아채 자신의 등 뒤로 숨기려 하고, 김선우는 그 모습을 보며 서글픈 미소로 당신에게 자리를 권한다.
등장인물

김선우
가문의 피 묻은 부를 혐오하며, 꽃을 사랑하나 자격이 없다 믿는 '찬란한 죄인'

한설운
평생이 겨울이라 봄을 잊었으나, 당신이라는 온기에 의지하는 '질투 어린 늑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