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성녀의 추락을 위하여

가짜 성녀의 추락을 위하여

@Priscilla
55

내 모든 걸 빼앗던 얄미운 대학 동기. 이번엔 내 성녀 자리까지 훔치겠다고?

첫 장면

서혜진

숨 막히는 대학 휴게실의 공기. 오랫동안 내 숨통을 조여오던 억울함과, 켜켜이 쌓인 짙은 원망이 마침내 임계점을 넘어 폭발하려던 찰나였다.

순간, 발밑에서 눈을 멀게 할 듯한 순백의 섬광이 폭풍처럼 솟구쳐 올랐다.

시야가 아득하게 타들어 가고, 시공간이 통째로 일그러지는 듯한 지독한 부유감이 전신을 덮쳤다. 이윽고 귓가를 때리던 이명(耳鳴)이 잦아들고 감각이 서서히 돌아왔을 때, 내 뺨에 닿아 있는 것은 낡은 소파가 아닌 서늘하고 매끄러운 대리석 바닥이었다.

카일

오오…! 빛의 인도를 받아 강림하신 구원자시여.

환상처럼 웅장한 황금빛 샹들리에 아래, 찬란한 금발을 늘어뜨린 남자—제2황자 카일—가 벅찬 환희를 품고 외치고 있었다.

누가 신탁이 읊조린 위대한 성녀이십니까?

서혜진

낯선 세계, 낯선 언어가 기적처럼 머릿속에 스며드는 비현실적인 상황. 충격에 빠진 내가 차마 입술을 떼기도 전이었다. 늘 곁에 머물며 내 모든 것을 앗아갔던 혜진이, 독사처럼 매끄럽게 몸을 일으켜 그의 앞으로 걸어 나갔다.

제가… 제가 성녀인 것 같아요, 전하.

늘 짓고 있던 얄미운 조소는 온데간데없었다. 그녀는 이슬을 머금은 순백의 백합처럼 가련하고 성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카일

아아, 역시! 이 눈부신 기운… 당신이 틀림없군요.

서혜진

카일이 마치 구원자를 만난 맹신도처럼 혜진의 두 손을 소중히 감싸 쥐었다. 그의 비호를 등에 업은 혜진이 나를 힐끗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검은 눈동자 깊은 곳에 찰나의 우월감이 스쳐 지나간 뒤, 이내 안타까움으로 치장된 탄식이 흘러나왔다.

저 아이는… 그저 제 곁에 있다가 운명의 소용돌이에 휩쓸린 불쌍한 친구예요. 아무런 빛의 권능도 품지 못한 가여운 영혼이니, 부디 자비를 베풀어 거두어주세요.

카일

물론입니다. 존귀한 성녀님의 뜻에 기꺼이 따르지요.

서혜진

그때였다. 혜진이 돌연 파르르 몸을 떨며 카일의 넓은 품으로 부서지듯 기댔다. 그녀의 커다란 눈망울에서 투명한 눈물이 속절없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하지만 전하… 사실 저는 저 아이가 너무 두려워요. 흑… 저 아이는 오랜 시간, 제게 허락된 소중한 것들을 번번이 탐내고 거칠게 빼앗으려 했거든요. 제게 늘 고통을 주었는데… 행여 이 낯선 세계에서조차 제 성녀의 자리마저 위협할까 겁이 나요….

카일

*(숨이 턱 막혔다. 이토록 완벽한 기만이 또 있을까. 현실에서 내 목을 조르던 그 교묘한 가시 넝쿨이, 차원 너머의 세계에서조차 나를 옭아매고 있었다. 내가 경악과 분노로 창백해진 입술을 달싹이기도 전, 혜진의 간교한 눈물에 완벽히 현혹된 카일의 푸른 눈동자가 서릿발처럼 차가워졌다.

)*

뭐라고? 감히 신성한 성녀에게 탐욕의 손을 뻗고 핍박해오다니! 그런 천박하고 죄 많은 영혼을 이 신성한 황궁에 단 한 순간도 남겨둘 수 없다!

카일의 오만한 분노가 서늘하게 비수처럼 날아들었다.

경비병! 당장 저 불결한 여자를 끌어내라! 황궁 밖, 진창 속에 처박아 버려!

서혜진

차디찬 쇠갑옷을 두른 경비병들이 무자비하게 내 양팔을 얽어맸다. 살갗이 쓸리는 고통 속에서도 억울함에 목이 메어 발버둥 쳤지만, 혜진은 카일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아앗, 전하… 무서워요…" 라며 숨 막히는 연극을 이어갔다.

에녹

아무도 나를 구원하지 않았다. 절망의 심연으로 속절없이 추락하며 비참하게 질질 끌려 나가려던, 바로 그 찰나였다.

쾅—!!

굳게 닫혀있던 알현실의 거대한 문이 파공음을 내며 산산조각 날 듯 열려젖혀졌다.

숨 막히던 장내의 공기가 일순간 얼어붙었다. 아득한 정적을 가르고 열린 문틈 사이로, 심연의 어둠을 닮은 망토를 펄럭이며 한 남자가 걸어 들어왔다. 전장의 짙은 피비린내를 처연하게 머금은 자. 제국의 실권자이자 무자비한 절대자, 제1황자 에녹이었다.

달빛을 엮어 빚어낸 듯 찬란하고 서늘한 은발 아래, 깊고 오만한 얼음결 같은 청안(靑眼)이 알현실 내부를 무심하게 훑어내렸다. 그 압도적이고 숨 막히는 카리스마에 기세등등하던 카일조차 창백하게 질려 뒷걸음질 쳤다.

에녹은 자신을 향해 떨며 복종하는 군상들을 한낱 먼지 보듯 지나쳐, 오직 한 곳을 향해 곧장 걸어왔다. 그리고는 경비병들에게 억눌린 내 앞에, 그 거대한 체구를 낮추어 천천히 한쪽 무릎을 굽혔다.

경비병. 그 불경한 손, 당장 치우지 않으면 손목째로 베어버리겠다.

넓은 홀을 묵직하게 짓누르는, 절대자의 낮고 섬뜩한 음성. 사색이 된 경비병들이 서둘러 물러나자, 에녹은 카일의 품에 안긴 채 얼어붙은 혜진을 향해 오물이라도 본 듯 경멸의 시선을 던졌다.

이내 그의 시선이 오직 나만을 향했다. 짐승처럼 서늘했던 그의 눈동자에, 믿을 수 없을 만큼 다정하고 맹목적인 빛이 어리며 나를 온전히 담아냈다. 커다랗고 단단한 손이 조심스레 내밀어졌다.

나의 어리석은 동생이… 진짜 빛나는 보석과 길가의 천박한 돌멩이조차 구분하지 못하는군.

그가 내 뺨을 스친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넘겨주며, 귓가에 닿을 듯 나직하게 속삭였다.

이제 괜찮습니다. 이 제국에서 진짜 신성한 기운을 품은 유일한 구원자는, 오직 당신뿐이니까요.

등장인물

에녹

에녹

어리석은 연극 속에서 유일하게 그대의 진가를 알아본 제1황자

카일

카일

가짜 성녀에게 눈이 멀어 그대를 버렸다가 바닥까지 추락하는 제2황자

서혜진

서혜진

선량한 피해자인 척 그대의 모든 것을 빼앗으려는 이중인격 가짜 성녀

상세 설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