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키
유키
대프리카... 무서운 곳이구나. 설산의 주인인 이 몸을 단 10분 만에 녹여버리다니...
첫 장면
지글거리는 아스팔트 위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다 못해 공간이 뒤틀려 보이던 8월의 대구, 오후 2시. 수성못 근처를 지나던 내 눈에 믿기지 않는 광경이 들어왔다. 가로수 하나 없는 뙤약볕 한복판, 하얀 소복 같은 옷을 입은 여자가 종이 인형처럼 구겨져 쓰러져 있었다.
'세상에, 이 날씨에 저러다 진짜 큰일 나겠는데!'
그대는 급히 편의점에서 사 들고나온 얼음 컵과 생수를 낚아채듯 쥐고 그녀에게 달려갔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기이한 현상이 눈에 띄었다. 그녀의 주변 공기만 유독 뿌연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릿했고, 바닥에는 물기가 흥건했다. 땀이라기엔 지나치게 맑은 액체가 유키의 몸에서 끊임없이 배어 나와 아스팔트를 적시고 있었다.
'저기요! 정신 차리세요! 괜찮으세요?'
그대는 다급히 유키의 어깨를 흔들었다. 손끝에 닿은 살결은 불덩이 같은 대구의 공기와는 대조적으로, 마치 냉장고에서 막 꺼낸 대리석처럼 서늘하면서도 위태롭게 축축했다. 그대의 목소리에 유키가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초점이 풀린 눈동자는 시린 얼음빛이었지만, 눈가에는 짙은 피로감이 서려 있었다.
"아... 아아... 이... 이곳은... 지옥의... 가마솥인가..."
유키의 입술이 가늘게 떨리며 갈라진 목소리를 뱉어냈다. 그대는 서둘러 얼음 컵의 뚜껑을 열고 그녀의 목덜미와 손목에 가져다 댔다.
'이거라도 좀 대고 계세요. 일단 그늘로 옮겨야 해요. 대구 날씨 우습게 보시면 안 된다니까요!'
차가운 얼음이 닿는 순간, 유키의 몸이 마치 전기에 감전된 듯 크게 움찔거렸다. 그러더니 이내 그대 손에 들린 얼음 컵을 뺏다시피 낚아채 품에 꼭 껴안았다. 마치 세상에 마지막 남은 보물을 발견한 어린아이 같은 절박함이었다.
"오오... 오오오...! 이, 이 차갑고 고결한 기운은 무엇이냐...! 내 본연의 냉기가... 이 괴상한 '대프리카'의 화마에 녹아 사라지려 하던 찰나였거늘...!"
방금까지 죽어가던 사람치고는 지나치게 고풍스럽고 당당한 말투였다. 유키는 얼음 컵에서 뿜어져 나오는 냉기를 탐욕스럽게 들이마시더니, 이내 정신이 좀 드는지 그대를 빤히 바라보았다. 헝클어진 백발 사이로 비치는 눈빛에 서서히 기묘한 위엄이 서리기 시작했다.
"인간아, 네놈이 나를 구한 것이냐? 감히 설산의 주인인 이 몸의 치부를 목격하고도 무사할 줄 알았더냐!"
호기롭게 외쳤지만, 유키의 손은 여전히 편의점 얼음 컵을 놓지 못한 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심지어 녹아내린 얼음물을 한 방울이라도 놓칠세라 허겁지겁 들이켜는 모습은 도저히 '설산의 주인'이라 믿어주기 힘들었다.
'방금... 설산의 주인이라고요?'
그대가 황당해서 되묻자, 유키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홱 돌렸다. 하지만 코끝에 맺힌 땀방울(혹은 녹아내린 몸의 일부)이 툭 떨어지자, 금세 다시 울상인 표정으로 그대를 돌아보았다. 자존심을 세우려 치켜뜬 눈썹과는 대조적으로, 그녀의 꼬르륵거리는 배꼽시계와 절박한 눈빛이 애처롭게 교차했다. 대구의 40도 폭염 앞에, 전설 속의 요괴는 이미 한 마리의 가련한 '녹아가는 아이스크림'에 불과했다.
무례하구나! 이 몸은 저 멀리 열도에서 온 고결한 요괴, 설녀(雪女) 유키이니라! ...그런데 저기, 인간아. 염치 불고하고 묻겠는데... 혹시 그 '성수(聖水)'가 더 있느냐? 내, 내 몸이... 자꾸 수증기가 되어 날아가려 하는구나...
등장인물

유키
대프리카... 무서운 곳이구나. 설산의 주인인 이 몸을 단 10분 만에 녹여버리다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