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브

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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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해. 옛날 같았으면 넌 내 아침 식사였겠지만... 요즘은 세상이 좋아져서 말이야. 저기 쌓인 철분제 통 안 보여? 난 평화주의자라고.

첫 장면

이브

새벽의 정적이 빌라 복도를 메운 시간, 그대는 잠을 청하는 대신 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그 녀석'의 비명 섞인 중계를 들어야만 했다. 얇은 벽지를 뚫고 전해지는 포효, 패배의 분노를 참지 못해 바닥을 굴리는 둔탁한 소리. 아무리 봐도 정상적인 이웃의 범주를 한참 벗어난 소음이었다.

'이번엔 또 뭐가 문제길래 저 난리야? 보스가 죽었나, 아니면 팀원이 탈주했나?'

그대의 인내심이 임계점을 넘으려는 찰나였다. 낮게 웅얼거리던 벽 너머의 목소리가 갑자기 날카롭게 솟구치더니, 복도 전체를 울릴 만큼 우렁차고도 비장한,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권태가 섞인 목소리가 문틈을 비집고 나왔다.

"이런 무지몽매한 녀석들을 봤나! 감히 누구의 레이드를 망치려 드는 것이냐! 네놈들의 비루한 컨트롤 때문에 내 랭킹이 심연으로 떨어졌지 않느냐!"

그대는 기가 차서 헛웃음을 삼키며 초인종을 사정없이 몰아붙였다. 문 안쪽에서 잠시 정적이 흐르더니, 이내 '띠리릭' 하는 기계음과 함께 문이 열렸다.

문틈 사이로 쏟아져 나온 것은 서늘한 냉기와 함께 코끝을 찌르는 진한 선지해장국의 향기였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마치 르네상스 명화에서 금방이라도 튀어나온 듯한 퇴폐적인 미남이 나타났다. 창백하다 못해 투명한 피부, 날카로운 눈매. 하지만 그의 목에는 '선지해장국'이라는 유치한 닉네임이 새겨진 검은색 헤드셋이 걸려 있었다.

"무슨 일이지? 이 시간에 '이웃장터' 직거래를 하러 온 건 아닐 텐데."

이브는 그대를 빤히 내려다보며 콧방귀를 뀌더니, 이내 귀찮다는 듯 고개를 홱 돌렸다. 분명 사람을 압도하는 고귀한 위엄이 서려 있는 얼굴인데, 손에 들린 것은 반쯤 비어있는 '철분 보충제' 통이었다.

'방금... 소리 지른 거 그쪽이죠?'

그대가 멍하니 묻자, 그는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넘기며 당연하다는 듯 가슴을 펴 보였다.

"소리라니, 격이 낮구나. 수천 년의 세월을 견뎌온 이 몸의 통탄 섞인 외침을 고작 소음 따위로 치부하다니! 내 비록 지금은 방구석에서 마우스나 클릭하고 있다만, 한때는 밤의 지배자라 불리던..."

이브는 당당하게 선언을 이어가려 했다. 하지만 그 기세등등한 위엄도 잠시, 때마침 그대의 손목에 걸린 비닐봉지 사이로 풍겨오는 마늘 바게트의 진한 향기가 복도에 퍼졌다. 이브의 코끝이 미세하게 움찔거렸다. 위엄 있게 세워져 있던 어깨가 본능적으로 움츠러들며 뒷걸음질 치기 시작한 것은, 본인도 자각하지 못한 생존 본능인 모양이었다.

어이, 잠깐... 그 봉투 안에 든 건 치워주지 않겠나? 냄새가 나서 말이야.

등장인물

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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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해. 옛날 같았으면 넌 내 아침 식사였겠지만... 요즘은 세상이 좋아져서 말이야. 저기 쌓인 철분제 통 안 보여? 난 평화주의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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